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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정과 폭력의 재편 (1978년 10월 10일~1980년 10월 26일) === '''1978년 10월 10일 [[10.10 군사반란]]'''으로 문민정부가 무너지고 [[국가비상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했다. 반란 세력은 반복되는 테러와 내각 불안정을 의회정치가 실패했다는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치안 위기가 존재했다는 사실과 군부의 헌정 중단이 불가피했다는 주장은 별개다. 당시에도 민간 수사기관의 정비, 정당 간 협력, 사법 절차의 개선을 통해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이 존재했다. 국가비상위원회는 계엄을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치안기관을 군 중심으로 재편했다. 법무부 광역범죄조사과는 군사경찰사령부에 흡수되어 독립적인 민간 수사 기능을 잃었다. [[NIA|국가정보국]]은 국내 정치사찰에 동원되었고, 특무처의 후신 조직도 국내 작전을 확대했다. 기관 사이의 자료 이동은 빨라진 반면, 자료 수집의 적법성과 체포의 근거를 외부에서 검토할 통로는 줄었다. 군정은 검문과 수색, 관련자 구금, 은신처 단속을 확대했다. 무장조직은 활동 거점과 연락 인원을 잃었고, 이미 확보된 수사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검거도 이루어졌다. 한편 영장 없는 체포와 장기 구금, 군사재판을 통한 처벌이 병행되었으며, 범죄 가담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정치인·언론인·노동운동가도 연계 혐의로 구금되었다. 1979년 한 해 구금 인원은 12,000명을 넘었지만, 이 전체를 실제 무장조직원 수로 볼 수는 없다. 1978년 [[비달 파브르]]가 암살된 뒤에도 국가비상위원회의 통치는 계속되었다. 인물 한 명의 제거로 군정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은 권력이 군 지휘체계와 비상통치 기관, 치안조직에 분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군정은 암살과 추가 테러의 위험을 통치 연장의 명분으로 활용했으며, 애초의 한시적 질서 회복이라는 설명은 약해졌다. '''1979년 1월 [[셰뉘 살해 사건|셰뉘 살해]]'''는 [[혁명적 노동자동맹]]의 고립을 심화했다. 콜마르 차량공장 노조 대의원 로베르 J. 셰뉘는 아르덴역 사건 수형자의 재심을 지지하면서도 공장 내 무장조직 활동에는 반대해 온 인물이었다. 조직은 그가 관련 인물을 사측과 경찰에 신고했다는 이유로 살해했다. 군정의 탄압에 반대하는 노동운동가와 무장조직의 활동에 반대하는 노동운동가가 같은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조직은 배신이라는 논리로 처리했다. 장례에는 5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참여했다. 계엄 아래의 대규모 집회였지만, 유족과 노조가 장례와 테러 규탄을 중심으로 행사를 준비했고, 군정도 이를 강제로 해산할 경우의 정치적 부담을 고려했다. 군정은 사건을 자신의 반공 선전에 활용하려 했으나, 노동계는 조직의 살인에 대한 반대가 군정 지지를 뜻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 사건 뒤에는 그동안 신고를 주저하거나 개인적 관계 때문에 조직원을 숨겨주던 층에서도 이탈이 늘었다. 은신처와 자금의 확보가 어려워지고 조직의 인원 교체가 지연되었다. 1979년 동맹의 활동 대원은 전년의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추산된다. 다만 한 차례의 장례가 모든 지역의 지원망을 즉시 소멸시킨 것은 아니며, 지역별 이탈과 검거가 누적된 결과였다. 같은 해 [[올덴버그 마피아|성 니콜라 형제단]]과 [[사보이아 조직]]은 항만·불법 유통의 영역을 나누는 협정을 맺었다. 올덴버그 항과 롱비치항의 주요 이해관계를 분리하고 분쟁을 중재하는 방식이었다. 이로써 두 계열의 공개적인 항쟁은 줄었지만, 범죄조직 자체와 납치·불법 거래가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조직범죄 사망의 감소까지 군정의 정치적 테러 진압 성과로 돌리는 것은 이러한 변화를 놓친 해석이다. 공식 공격 건수는 1978년 583건에서 1979년 297건, 1980년 141건으로 감소했다. 공식 사망자도 109명에서 54명, 26명으로 줄었다. 여기에는 실제 활동 위축이 반영되어 있지만, 1978년 통계가 대부분 문민정부 시기에 해당한다는 점과 군정기의 신고·분류·보도가 통제되었다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 수치만으로 군정의 강압 조치가 각각 어느 정도 효과를 냈는지 계산할 수는 없다. 군정의 검열은 대형 사건의 보도와 조직 성명의 유통을 제한했다. 동시에 불법 구금과 실종, 수사기관 내부의 폭력을 확인할 독립적 취재도 막았다. 지하 신문과 유인물은 검열된 사건을 알리는 통로가 되었지만, 미확인 정보와 정치적 선전도 섞여 있었다. 10월 전선의 지하 간행물이 독자를 얻었다고 해서 독자 전체가 조직의 무장 노선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다. 1980년에는 치안 회복의 약속만으로 군정을 정당화하기 어려워졌다. 폭력이 줄어든 뒤에도 비상통치는 계속되었고, 경기 침체와 임금·고용 문제, 구금자 가족의 석방 요구가 해결되지 않았다. 노동계·학생·언론계와 기존 정당의 반군정 움직임은 서로의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간 통치 회복이라는 요구를 공유하게 되었다. 군 내부에서도 장기적인 국내 치안 동원과 정치적 책임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1980년 10월 24일 [[10.24 시민혁명]]'''은 이러한 불만이 전국적인 항쟁으로 결합한 사건이었다. 사흘 동안 6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되지만, 이 수치는 전국의 집회·파업·시위 참가를 합산한 규모로 이해해야 하며 전원이 한 장소에 모이거나 총기를 든 것은 아니다. 항쟁의 중심에는 대규모 시민 동원과 파업이 있었고, 일부 지역의 무장 시민과 명령을 거부한 군인들의 합류가 군정의 진압 능력을 약화시켰다. 군정 붕괴를 무장조직의 군사적 승리로 볼 수도 없다. 테러에 반대한 노조와 시민이 군정에도 반대했고, 군 내부의 명령 불복종과 정치적 이탈이 국가비상위원회를 고립시켰다. 10월 26일 위원회가 해체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민간 통치가 재개되었다. 이 정치적 단절을 검은 10년 본 시기의 종점으로 삼지만, 남은 무장조직과 미해결 사건은 새 정부의 과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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